양택풍수

조선내화 이훈동회장님.

담휴재 2015. 4. 30. 18:23

조선내화 창업주 이훈동 회장

http://diga.egloos.com/10636908


 
조선내화 창업주 이훈동 회장

세계적 내화물(耐火物·고온에 견디는 물질) 제조업체인 조선내화㈜ 창업주인 성옥(聲玉) 이훈동(李勳東·93) 조선내화 및 전남일보 명예회장이 지난 30일 오전 10시 별세했다.

전남 해남서 태어난 이 명예회장은 일제 강점기던 16세 때 일본전기공업㈜이 운영하던 해남 성산의 '쇼와(昭和)광업소'에 견습사원으로 취업한 이후 한 길을 걸어왔다. 해방 후인 1947년 창립된 조선내화화학공업 상무로 경영에 참여, 1953년 37세에 조선내화 대표가 됐다.

1970년대에 조선내화 포항1·2공장을 준공했고, 1986년엔 광양공장을 세워 제철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조선내화는 이후 중국 현지법인을 설립하는 등 성장해 현재 국내외 19개 공장을 거느린 글로벌 전문 기업이 됐다.

고인은 회갑이던 1977년 사재로 성옥문화재단을 설립, 현재까지 4000여명에게 35억원의 장학금도 지급했다. 1988년엔 차남인 고(故) 이정일 전 국회의원과 함께 전남일보를 창간했다.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은탑산업훈장과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유족은 이화일 조선내화 회장 등 6남 4녀. 장례는 회사장으로 치러진다. 빈소 서울아산병원(02-3010-2631). 발인 2일 오전 5시, 영결식은 2일 오전 11시 목포 성옥기념관.

 

 

 

목포 유달산 아래 아늑히 자리 잡은 성옥기념관은 조선내화(주) 창업자이며 전남일보 발행인 성옥 이훈동(聲玉 李勳東)선생의 88세 미수(米壽)를 기리기 위하여 2004년 선생의 자녀들이 건립한 문화공간입니다.

전남 문화재 자료 제165호인 이훈동 정원옆에 대지 524평, 건물 224평, 높이 9m의 석조 건물은 아름다움이 돋보입니다.

기념관에는 성옥선생이 평생 정성들여 모아온 근ㆍ현대 서예 대가의 작품과 한국화는 물론 도자기 등도 함께 감상하실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다.

위치가 유달산 등구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목포시민과 목포를 찾는 외지인의 문화쉼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성옥 이훈동은 원주 이씨(原州李氏) 시조(始祖) 이신우(李申佑)의 29세손 이영률(李泳律)과 이백임(李白任)의 3남 5녀 중 장남으로 1917년 전남 해남군 황산면 외입리에서 태어났다.

 

“오늘의 제가 있는 건 모두 어머님 때문입니다. 어머님은 나와 가정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셨고, 나는 어머님께 효도하려는 일념으로 꼭 성공하겠다며 일에 몰두했습니다.

또 하나의 성공 비결이 있다면 그건 한 우물을 팠다는 것입니다. 열여섯 나이에 성산 광산에 취직해 내화물과 인연을 맺은 이래 평생 이것만을 내가 갈 길로 여기며 앞장서 내달렸습니다.”

... 이훈동의 어록 중에서

 

 

성옥 이훈동과 조선내화

 

8ㆍ15 해방 이후 군정을 거쳐서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섰다. 정부는 환수된 일본인 재산을 매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철광, 금광, 석탄 광산, 적산 가옥에 신경을 썼지만 납석 광산에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아니 눈도 돌리지 않았다기보다는 납석의 중요성을 모르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이 때문에 두고두고 기쁨을 안겨주고 기업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성산 광산을 청년 이훈동은 정부로부터 헐값에 불하받았다.

1946년 4월 20일 성산 광산을 손에 넣은 이훈동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화신백화점 박흥식 씨 소유의 완도 노화 광산까지 사들인 후 시간만 나면 내화연와의 원료가 되는 납석과 점토, 규조토 등을 찾기 위해 전국을 쏘다녔다.

 

점토는 바닷가 갯벌이 오래 순화된 것으로 흔히 찰흙이라하며 공예품, 질그릇을 빚는 데 쓰기도 하고 백점토의 경우는 고급 도자기의 원료로 쓰인다. 점토의 상급품은 점력이 좋고 염분이 적어야 하며 모래가 섞이지 않야 한다. 손으로 이겨 보면 점력을 알 수 있고, 한 점 떼어 혀로 맛을 보면 짠맛의 정도를 알게 되며, 어금니 사이에 넣고 잘근잘근 씹어 보면 모래의 크기와 함량의 정도를 알게 되는 것이다.

 

조선내화공업주식회사는 1938년7월 20일, 자본금 40만 엔으로 일본인 사토 등에 의해 목포시 온금동 122번지에 설립되었다. 몇 해 전까지 가동하던 조선내화 목포 공장 자리가 바로 그곳으로, 원료 및 제품 수송이 용이하게 선창과 맞닿은 곳에 자리 잡았다.

일제의 전쟁 수행을 위한 경제 침탈 과정의 일환으로 일본의 군수자본을 기반으로 설립된 조선내화공업주식회사는 해방과 함께 미군정의 관재처로 넘어가 관리되다가 한국인에게 소유권이 넘어가게 된다.

 

1948년 당시 이훈동은 성산과 완도 광산에서 채광한 납석과 고령토, 점토 등을 조선내화에 납품하고 있었는데,  친구의 권유로 조선내화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광산 일을 제쳐 두고 조선내화에 매달렸는데 그만 6ㆍ25가 터지고 말았다.

한국전쟁은 그야말로 민족사의 비극이었다. 수백 만 명이 죽고, 주요 산업 시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조선내화의 경우는 그 시설이 중공업에 필수적이며 또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특수성 때문에 피해가 더욱 컸다. 총 피해액이 무려 2억 원이 넘었다. 또 공장의 80퍼센트가 불에 타 한때 복구가 불가능하리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이는 전쟁 초기 불과 몇 달만의 일이었다.

 

손용기 대표이사가 찾아와 조선내화 인수를 권유했다.

여러명이 운영하던, 그것도 전쟁으로 대부분의 시설이 파괴된 조선내화를 인수하는 것은 당시 이훈동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조선내화를 되살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회사를 인수했다.

 1950년대가 거의 그러했지만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그저 공장 만들기에 모두 신들린 사람처럼 일에 미쳐 있는 모습이었다.

해가 다르게 조선내화는 달라져 갔다. 공장다운 면모를 갖추어 가고 53년 60톤급 1호 가마에서 54년에는 70톤급 2호 가마까지 운영하게 됐다. 55년에는 설비 복구 작업과 병행해 설비 증설도 시작했다.

공장 인수 6년 후인 50년대 말쯤에서야 조선내화는 연간 1만5천톤을 생산해냄으로써 전쟁 이전의 생산 능력을 회복하게 됐다.

 

전쟁은 참으로 혹독한 것이며 복구 또한 엄청난 자금과 피땀을 요구하는 것이다. 조선내화의 복구는 이처럼 이훈동의 30대 후반을 송두리째 삼키고서야 발전이 아닌 전쟁 전의 모습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이 후 이훈동은 우리나라도 공업국이 될 것이라는 일념 하나로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하는 세월을 우직하게 내화연와에만 매달려 왔다.

"포항제철이 있고 조선내화 있었다."고 혹자는 말한다. 맞는 말이다. 포항제철이 있고 조선내화가 있기 위해서 나는 포항제철이 태어나기 스무 해 전부터 몸부림쳐 왔으니 남모를 고생인들 왜 없었겠는가?

조선내화의 연간 외형은 3,000억 원에 이른다. 외형 3,000억 원대의 회사는 어쩌면 셀 수도 없이 많을지도 모르지만 이훈동에게 오늘의 조선내화가 오랜 세월 값진 정성으로 키워낸 기업이라 자랑스러운 것이리라.

 

 

성옥 이훈동 기업인생 60년

조선내화주식회사를 비롯 완도 광산, 성산 광산 등 4개 광산과 성옥산업(주), (주)대주기공, (주)대한세라믹스, (주)한국분체, (주)대한소결금속, (주)삼한, (주)전남일보, (주)클럽900 골프장과 중국에 영구광양내화재료유한공사, 산서오옥광양내산내화재료유한공사, 안산포항특종내화재료유한공사, 백작 컨트리클럽 등 현지 법인도 가지고 있다.


http://freeasbirds.blog.me/90101330863

전남일보 2009년 12월 22일

'성옥문화재단'이 성옥기념관에 소장돼 있는 미술작품을 한권의 도록에 엮었다. 

성옥문화재단은 최근 '성옥(聲玉) 이훈동기념관 소장품선'을 발간했다. 도록에는 성옥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서예와 한국화 작품 65점이 수록됐다. 

특히 소장품들은 조선시대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한국 화단 거목들의 작품이 즐비하다. 

도록에는 공재 윤두서(1668∼1715년)의 산수도와 겸재 정선(1676∼1759년)의 신선도, 추사 김정희(1786∼1856년)의 예서와 행서 8곡 병풍, 소치 허련(1808∼1893년)의 묵목단 8곡 병풍, 흥선대원군으로 더 잘 알려진 석파 이하응(1820∼1898년)의 묵란도 10곡 병풍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이외에도 의재 허백련(1891∼1977년)의 산수화, 이당 김은호(1892∼1979년)의 화조도, 소전 손재형(1903∼1981년)의 글씨, 고암 이응로(1904∼1989년), 남농 허건(1907∼1987년), 운보 김기창(1913∼2001년)의 작품도 포함됐다. 

목포시 유달동에 자리 잡은 성옥기념관은 조선내화를 설립, 세계 최고의 내화물 기업으로 키운 성옥 이훈동 회장을 위해 2004년 설립된 문화 공간이다. 유달산과 함께 전남도문화재자료 제165호인 '이훈동 정원'과 연계돼 빼어난 주변경치를 자랑하고 있다. 
기념관에 소장돼 있는 작품들은 이훈동 회장이 평생 모아온 것들이다. 평소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이 회장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목포로 피난 온 사람들이 헐값에 문화재를 파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작품을 수집했다. 이후에도 남도의 많은 예인들을 후원, 교류하며 지역에서 쉽게 접하기 힘든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무료로 관람이 가능하다. 

성옥문화재단 이화일 이사장은 "옛 선인들의 귀한 작품을 아끼고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후손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을 담아 도록을 제작하게 됐다"고 밝혔다. 

한편 1977년 설립된 성옥문화재단은 지역문화발전과 인재육성에 많은 정성을 쏟고 있으며 그동안 4000여명의 지역 인재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해 오고 있다. 

문의(061)244-2527. 

강현석 기자 hskang@jnilbo.com

외가집

언니가 블러그에 외할머니를 그리는 글을 올렸다.

그 글을 읽으면서 생전의 외할머니 모습이 떠올랐다.

또 외할머니가 사시던 집도

우리집은 걸어서 외가집 뒷담까지 3분거리에 있다.

(울 엄마는 친정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을 사시다 가셨네요^^).

그렇지만  외가집이 워낙 커서 대문으로 들어가려문 거의 10분 이상을 걸어가야 한다.

운 좋은 날 뒷문으로 들어가면 3분이면 집에 도착할 수 있다.

 

아,,,블러그에 외가집을 소개해 볼까하고 인터넷 서핑을 했더니

아주 많이 소개되어 있었다.

(시간이 있으면 내가 정리하고 싶었는데 변명같지만 지금 많이 바쁩니다요^^)

그래서,,,,,,.남의 시진을을 살짝,,,,,,,,(^+^)

 

 

에피소드!) 아래 보시면 알겠지만 그 좋은 정원 한 기퉁이에 외할머니가 콩, 상추,파등을 심으셨습니다.

   자식들이 아무리 성공해도 그 옛날 시골에서 농사 짓던 습성을 버리지 못하신것 같습니다.

   인간은 나이를 먹으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고 하니까 본래의 모습을 지키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외가집 이훈동정원의 소개

나의 외가집인 이훈동 정원은 목포 유달산 자락에 있다.

여기는 성옥기념관인데 외숙 미수때(88세) 아들 딸들이 지어드렸다.

이곳에는 평생 외숙이 모은 그림, 도자기등 골동품과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유품들이 전시되어있다.

외할머니가 쓰시던 골무 비녀등,,,

외숙은 무지 무지 효자였다.

어려서 외할머니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외할머니 호강시키려고 돈을 벌고 싶었다고 한다.

해방직후부터 광산업,내화벽돌공장을 시작하였는데 사업이 성공하였다.

사업이 어느정도 기도에 오르자 젊은 잎새, 매취순, 복분자주로 유명한 보해가 위기에 빠졌을 때

목포기업을 살리기 위해 인수했다고 한다.

그런데 술 회사라서 영업을 하면서 술을 많이 마시고 늦게 들어오시는 것을 보고

할머니가 걱정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외숙은 보해가 기도에 오르자마자 다른 사람에게 넘겨버렸다.

외숙이 돈을 번 것은 어머니에게 효도하기 위해서 였는데 꺼꾸로 어머니를 걱정시키고 있다며,,,

 

외숙은 서예, 그림에도 능해서 한국화의 대가 허백련과 같이 그린 그림도 많은데

성옥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외숙은 어려서 집이 가난하지 않았더라면 화가나 서예가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외할머니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외할머니 호강시키려고 돈을 벌고 싶었다고 한다.

외숙은 판소리도 잘한다.

그래서인지 예술가들에게 많은 지원을 했다고 한다.

우리 언니도 판소리를 잘 하는데 집안의 내력인가 보다.

 

<<<아래는 다른 블로그에서 가져온 글이다>>>

 

이훈동씨는 1917년 10월 17일 해남에서 태어난 기업인으로 조선내화(주) 창업자이며 전남일보 발행인이다. 이훈동정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성옥기념관은 선생의 88세 미수(米壽)를 기리기 위하여 2004년 자녀들이 건립한 문화공간으로 대지 524평, 건물 224평, 높이 9m의 석조건물이다. 성옥기념관에 도착해 오전 9시가 안된 이른 시간이었지만 기념관으로 들어가 돌아보고 그곳에 있는 직원에게 정원은 어떻게 볼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른시간이긴 한데 이야기 해 둘 터이니 집 앞으로 가서 초인종을 누르라고 했다. 그렇게 들어간 정원은 무척 넓었으며 관리를 하는데도 보통 정성이 들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전라남도 목포시 유달동 4-1번지에 있는 이훈동정원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65호이다. 유달산(228m)의 남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1930년대에 일본인 우찌다니 만빼이(內谷萬平)가 만든 일본식 정원이다. 해방 후 해남 출신의 국회의원 박기배씨가 소유하던 것을 1950년대에 이훈동씨가 사서 소유하고 있다.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
현관
현관 입구에 삼성 고 이병철회장이 갖고 싶어했다는 향나무가 일품인데 사진이 없다.
 
 
5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원형이 바뀌기는 했으나 일본식 정원의 특징을 전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개인정원으로는 호남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로 입구정원, 안뜰정원, 임천정원, 후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무의 종류도 113종에 이른다. 한국야생종 37종, 일본원산종 39종, 중국원산종 25종, 기타 12종이 있으며, 이 중에서 상록수는 69종으로 전체의 61%를 차지하고 있다. 정원수 중에서 현관 앞에 있는 암수 한 쌍의 일본원산 향나무는 사람이 심은 것이 아니라 자생목인데 일본의 화산 폭발 때 그 씨가 목포까지 날아와서 싹이 텄을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유달산 유선각이 보입니다.
많이 올라 간 산입니다.
유달산은 228m인데 [두고 두고 팔아먹자]라는 뜻^^^

외숙 동상입니다.
 
동산 위에 잔디밭이 있는데
서울에 사신 외숙이 오시면 그 곳에서 파티를 자주했습니다.
 
그 큰집에 외할머니와 관리인 부부만 살고 있었는데 자주 놀러 다녔습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6학년이었을 겁니다.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아~~글쎄 그 큰집에 저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외할머니와 관리인 부부가 어디가고 없는 것입니다.
그 때의 공포란~~~~~무서워!!!!!
큰집은 큰 만큼 사람이 가득차야 좋은 것 같습디다.
 
우리 집은 유달산 중턱에 있었기 때문에 뒤에는 유달산 앞에는 막힐게 없는 목포 앞바다,,,,
전망하나는 기가 막혔습니다.
우리 식구들은 좁고 답답한 것이 싫다며 모두 큰집을 좋아하는데
넓은 뒤산(유달산)과 넓은 앞바다(목포앞바다)를 마음껏 즐겼기 때문일 겁니다.
 
정원을 만들었다는 우찌다니 만빼이를 예전 자료에서 찾아보았다.
전남의 쌀과 면화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내곡만평(內谷萬平)이 전남 산업계에 쏟아붓는 공로는 막대한 것이었다. 그는 병고현(兵庫縣) 출신으로 1909년(명치 42) 부산으로 건너왔으며 일찍 전남의 쌀에 관심을 두어 1911년(명치 44)에 목포로 옮겨가서 미곡무역상을 개업했다. 1933년 10월 당국의 면화증산계획에 순응하여 면화공장의 통제를 기도하여 자본금 150만원의 전남면화주식회사를 창립하여 목포지역에 이미 세워진 24개 조면공장을 합병하여 조면기 734대를 총괄하게 되었으며 영역을 확장하여 면화까지 취급했다. 조선취급소법이 공포되어 목포에 미곡거래소를 신설했다.

그는 당대에 백만장자가 된 사람으로 그간의 분투노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떤 사업에도 손 대지 않은 것이 없는 그는 활동가였고 인내력이 강했다. 계획한 사업은 철저하게 진행했다. 이런 정열과 노력이 있었기에 그런 정도의 재력을 비축하여 남선(南鮮) 재계의 제일인자로 번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또 의리가 많았으며 의협심이 풍부해 공공을 위해 힘쓴 적도 매우 많았다. 세계적 시설로 일컬어지는 조선나예방협회(朝鮮癩豫防協會)가 설립되는 데에 기금 5만원을 기부하였다.

목포미곡취인소 이사장(木浦米穀取引所 理事長) , 목포제빙주식회사장(木浦製氷株式會社長), 목포미곡금융회사장(木浦米穀金融會社長), 전남면화회사장(全南棉花會社長) 등으로 광범위하게 활동.
가족으로 부인 내곡이자(內谷里子,1883년 8월생), 내곡현일(內谷賢一, 장남, 1910년 2월생), 내곡혜미자(內谷惠美子, 장녀, 1912년 10월생), 내곡천대자(內谷千代子, 차녀, 1914년 8월생)이 있었다.
현주소는 全羅南道 木浦 幸町 1丁目 13 이다.

이 주소와 현재 이훈동정원이 있는 곳의 위치가 1926년 지도로 살펴보니 서로 다른 곳이었으며 그로 미루어 보면 그는 그곳으로 나중에 이사를 한 것 같다.

참조: 조선공로자명감, 아부훈(阿部薰), 1935
      사업과 향인 제1집, 고교삼칠(高橋三七), 1939
      (재조선내지인) 신사명감, 조선공론사, 1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