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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충석
남당산소사적(南堂山所事蹟)
남당산소는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읍 남당리로 원래는 함열현 동사면 조왕등이다.
함문지후공께서는 말년에 경상도산음 현감으로 출보되었다가, 임기가 끝난 뒤에도그 고을 석답촌 자연동(紫煙洞)에서 눌러 사시다가 별세 하신고로 내외분의 묘소가 산음에 계신 까닭에 청화부원군께서는 명당을 물색하여 면례해 드리고자, 1343년 전후를 기하여 충청도 한산땅에 큰 아드님 청성백을 가정이곡선생(稼亭李穀先生)에게 유학시키고 있었던 관계로 수차 왕래할 적에 이선생으로부터 본 명당을 소개받고 현장을 답사한 바, 천하대지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 자리에 강릉김씨의 사당이 있는지라 칠등(漆燈)을 묻어 치표(置標)하고 아드님에게 네가 장차 출세하여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면 산음 산소를 이곳으로 면리해 드리라고 유언 하셨다.
그후 청성백께서는 고려 조정에서 입신양명하여 50세가 되던 1377년(우왕3년)에 동직밀직사사겸 상호군을 거쳐, 서해도도원수겸, 도순문사에 제수되어서는 신주, 문화, 안악, 봉주 등지에 출몰하고 있는 왜구를 소탕작전 중 진포 지금의 금강 하류와 함열지역까지 추격하여 완전 소탕하고 개선한 바 있었는데, 그때 전투중 남당산을 지나다가 옛날에 아버지와 같이 와서 함문지후공 내외분의 묘소로 치표해 두었던 기억이 떠올라 수백 군졸을 인솔하고 사당집 주인 강릉김씨를 찾아가서 사당자리는 장차 우리 가문에서 장사 지내고자 칠등으로 치표된 곳인바 이제 설묘쿄자 하는 바이니 사당을 철거해 달라고 요청하자,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주인이 말하기를 선대부터 가문이 위급한 사태에 직면하면 사당안의 궤를 열어보라는 유언이 전해오고 있으니 보고난 뒤에 대답하겠다고 하고 나서 사당에 있는 궤를 열어본 바, 이 땅은 태등( 燈)이 불멸하니 장차 심문이 장사하리라 요청이 되면 이유를 불문하고 허락하여 멸문의 화를 면하도록 하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하며, 이는 반드시 하늘이 정해놓은 심문의 명당이라 하면서 '곧바로 사당을 옮겨 놓을 터이니 언제든지 장사지내도록 하시오'하여 원만히 타협이 성립되어, 그해 9월 20일에 산음 산소를 남당산으로 면례해 드렸고, 1379년 봄에는 석물을 설치해드렸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 후로는 실전하였는데, 1705년(숙종3년)에 전라도 임피(臨陂)사느 죽계공(竹溪公) 규(圭)께서 청년시절 려산향시에 함열 사는 김린을 만나 같은 여관에서 투숙하여 환담하던중 김린이 심규더러 묻기를 "선세에 함문지후공 연(淵)이 있는가?" 규가 대답하기를 '계시다.' "묘소를 아는가?" '모르고 있다.' "나의 선대 묘소도 함열에 있는데 그 옆에 고총이 있고 묘갈에 직함과 성명이 쓰여 있는 고로 내가 알고 있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도중, 김린의 숙부가 들어와서 김린을 꾸짖으며 말을 못하게하니 김린이 당황하며 말을 더하지 못하게 되었다. 규께서 귀가하여 집안 어른 준원(俊元)에게 그 사실을 고하니 준원께서는 아들을 김린의 부친 김응삼에게 보내서 간곡하게 물었으나, 굳게 숨기고 말하지 않는고로 서울 종중으로 통고했다. 종중에서는 유사(有司)로 하여금 수차 응삼을 심방하고 교섭하였으나 더욱 완강하게 숨겼으니 이는 그 선대로부터 함문지후공의 묘지에 투장한지가 이미 수세를 지냈으며, 표석은 수중에 버리고 지석은 파내서 못가운데 던져 영구히 감추어 버리려 했었던 까닭이었다.
후손 중량(仲良)께서 담양군수 시절에 정성을 다하여 지석이 감추어져 있는 곳을 탐문하여 매수하고 함열 현감에게 고발한 후, 1715년(숙종41년)에 못물을 퍼내고 지석을 찾아내니, 장이 8치요 광이 4치가량 되는 돌에 세줄로 쓰여지기를 중간에 함문지후심연지묘라 쓰고 왼쪽에는 흘산남당산진좌술향(屹山南堂山辰坐戌向)이라 쓰여 있고, 오른쪽에는 흥무 10년(1377년) 9월 12일장(葬)이라 쓰여 있으되 자획이 확연하니 김응삼도 김히 더 이상 은폐할 도리가 없어서 모든 것을 자복하고 그가 투장한 것을 모두 이장해 갔다. 판서공(檀), 감사공(仲良), 장영공(尙尹), 정언공(尙鼎) 등 경향의 제종이 모여서 상하봉을 개봉하였는데 묘갈(墓碣)이 훼박되었으며 고비위의 위차도 고증할 길이 없으나, 또한 억지로 변단할 것이 못되므로 양묘의 중간에 묘갈비명을 세우구 구 지석은 성석밑에 뭍었다. 실전된지 200여년만에 비로소 봉영을 찾아 모시게되니, 1720년(숙종46년) 지산 상공 수현(壽賢)께서 호서를 안극할 때에 만사상공지원(晩沙相公之源)의 외손으로 호남도백 이집과 심문의 외손인 함열현감 최상(崔祥)이 협력해서 상석을 갖추고, 그해 8월 13일에 비갈을 13세손 황해도관찰사 중량이 찬(撰)하고 글씨는 15세손 준(俊)께서 써서 세워드려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수호 봉향 절차는 보광산소의 예에 의하여 호장에게 일임해서 거행케 하였으며, 입토도 40여두락을 마련해서 음력 정월과 9월 15일에 향사케 하였고, 1806년(순조6년)에는 두실상공 상규께서 전라도 감영에 재임시 제각 3칸을 창간하였고, 1844년(헌종10년) 선익(宣益)께서 임피현령 재임시 행랑 7칸을 지으셨는데 갑오경장 후로는 호장제도가 폐지되면서 수호와 향사가 산유사에게 일임되어 왔으며, 임야와 입토는 종중 소유로 신고 되었다. 1976년 임야 일부가 농지로 개발된 것을 처분하여 대규모의 제각을 기공하여 9월 12일에 낙성식을 거행한 바 있으며, 현재의 춘추향사는 3월과 9월 11일에 봉행하고 있다.
남당산소사적(南堂山所事蹟)
남당산소는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읍 남당리로 원래는 함열현 동사면 조왕등이다.
함문지후공께서는 말년에 경상도산음 현감으로 출보되었다가, 임기가 끝난 뒤에도그 고을 석답촌 자연동(紫煙洞)에서 눌러 사시다가 별세 하신고로 내외분의 묘소가 산음에 계신 까닭에 청화부원군께서는 명당을 물색하여 면례해 드리고자, 1343년 전후를 기하여 충청도 한산땅에 큰 아드님 청성백을 가정이곡선생(稼亭李穀先生)에게 유학시키고 있었던 관계로 수차 왕래할 적에 이선생으로부터 본 명당을 소개받고 현장을 답사한 바, 천하대지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 자리에 강릉김씨의 사당이 있는지라 칠등(漆燈)을 묻어 치표(置標)하고 아드님에게 네가 장차 출세하여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면 산음 산소를 이곳으로 면리해 드리라고 유언 하셨다.
그후 청성백께서는 고려 조정에서 입신양명하여 50세가 되던 1377년(우왕3년)에 동직밀직사사겸 상호군을 거쳐, 서해도도원수겸, 도순문사에 제수되어서는 신주, 문화, 안악, 봉주 등지에 출몰하고 있는 왜구를 소탕작전 중 진포 지금의 금강 하류와 함열지역까지 추격하여 완전 소탕하고 개선한 바 있었는데, 그때 전투중 남당산을 지나다가 옛날에 아버지와 같이 와서 함문지후공 내외분의 묘소로 치표해 두었던 기억이 떠올라 수백 군졸을 인솔하고 사당집 주인 강릉김씨를 찾아가서 사당자리는 장차 우리 가문에서 장사 지내고자 칠등으로 치표된 곳인바 이제 설묘쿄자 하는 바이니 사당을 철거해 달라고 요청하자,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주인이 말하기를 선대부터 가문이 위급한 사태에 직면하면 사당안의 궤를 열어보라는 유언이 전해오고 있으니 보고난 뒤에 대답하겠다고 하고 나서 사당에 있는 궤를 열어본 바, 이 땅은 태등( 燈)이 불멸하니 장차 심문이 장사하리라 요청이 되면 이유를 불문하고 허락하여 멸문의 화를 면하도록 하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하며, 이는 반드시 하늘이 정해놓은 심문의 명당이라 하면서 '곧바로 사당을 옮겨 놓을 터이니 언제든지 장사지내도록 하시오'하여 원만히 타협이 성립되어, 그해 9월 20일에 산음 산소를 남당산으로 면례해 드렸고, 1379년 봄에는 석물을 설치해드렸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 후로는 실전하였는데, 1705년(숙종3년)에 전라도 임피(臨陂)사느 죽계공(竹溪公) 규(圭)께서 청년시절 려산향시에 함열 사는 김린을 만나 같은 여관에서 투숙하여 환담하던중 김린이 심규더러 묻기를 "선세에 함문지후공 연(淵)이 있는가?" 규가 대답하기를 '계시다.' "묘소를 아는가?" '모르고 있다.' "나의 선대 묘소도 함열에 있는데 그 옆에 고총이 있고 묘갈에 직함과 성명이 쓰여 있는 고로 내가 알고 있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도중, 김린의 숙부가 들어와서 김린을 꾸짖으며 말을 못하게하니 김린이 당황하며 말을 더하지 못하게 되었다. 규께서 귀가하여 집안 어른 준원(俊元)에게 그 사실을 고하니 준원께서는 아들을 김린의 부친 김응삼에게 보내서 간곡하게 물었으나, 굳게 숨기고 말하지 않는고로 서울 종중으로 통고했다. 종중에서는 유사(有司)로 하여금 수차 응삼을 심방하고 교섭하였으나 더욱 완강하게 숨겼으니 이는 그 선대로부터 함문지후공의 묘지에 투장한지가 이미 수세를 지냈으며, 표석은 수중에 버리고 지석은 파내서 못가운데 던져 영구히 감추어 버리려 했었던 까닭이었다.
후손 중량(仲良)께서 담양군수 시절에 정성을 다하여 지석이 감추어져 있는 곳을 탐문하여 매수하고 함열 현감에게 고발한 후, 1715년(숙종41년)에 못물을 퍼내고 지석을 찾아내니, 장이 8치요 광이 4치가량 되는 돌에 세줄로 쓰여지기를 중간에 함문지후심연지묘라 쓰고 왼쪽에는 흘산남당산진좌술향(屹山南堂山辰坐戌向)이라 쓰여 있고, 오른쪽에는 흥무 10년(1377년) 9월 12일장(葬)이라 쓰여 있으되 자획이 확연하니 김응삼도 김히 더 이상 은폐할 도리가 없어서 모든 것을 자복하고 그가 투장한 것을 모두 이장해 갔다. 판서공(檀), 감사공(仲良), 장영공(尙尹), 정언공(尙鼎) 등 경향의 제종이 모여서 상하봉을 개봉하였는데 묘갈(墓碣)이 훼박되었으며 고비위의 위차도 고증할 길이 없으나, 또한 억지로 변단할 것이 못되므로 양묘의 중간에 묘갈비명을 세우구 구 지석은 성석밑에 뭍었다. 실전된지 200여년만에 비로소 봉영을 찾아 모시게되니, 1720년(숙종46년) 지산 상공 수현(壽賢)께서 호서를 안극할 때에 만사상공지원(晩沙相公之源)의 외손으로 호남도백 이집과 심문의 외손인 함열현감 최상(崔祥)이 협력해서 상석을 갖추고, 그해 8월 13일에 비갈을 13세손 황해도관찰사 중량이 찬(撰)하고 글씨는 15세손 준(俊)께서 써서 세워드려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수호 봉향 절차는 보광산소의 예에 의하여 호장에게 일임해서 거행케 하였으며, 입토도 40여두락을 마련해서 음력 정월과 9월 15일에 향사케 하였고, 1806년(순조6년)에는 두실상공 상규께서 전라도 감영에 재임시 제각 3칸을 창간하였고, 1844년(헌종10년) 선익(宣益)께서 임피현령 재임시 행랑 7칸을 지으셨는데 갑오경장 후로는 호장제도가 폐지되면서 수호와 향사가 산유사에게 일임되어 왔으며, 임야와 입토는 종중 소유로 신고 되었다. 1976년 임야 일부가 농지로 개발된 것을 처분하여 대규모의 제각을 기공하여 9월 12일에 낙성식을 거행한 바 있으며, 현재의 춘추향사는 3월과 9월 11일에 봉행하고 있다. |
2005-04-10 17:14:5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