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이야기

청송심씨2세조 심연공묘

담휴재 2007. 5. 25.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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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심씨 2세조 심연(沈淵) 묘- 69차 2003년9월28일전북 군산,옥구답사

익산시 함열읍 낭산면 청송심씨 2세조 심연(沈淵) 묘

전북 익산시 함열읍 낭산면에 청송심씨 2세조인 심연 묘가 있다. 시조(1세조) 심홍부(沈洪孚)는 고려 때에 문림랑 위위사승을 역임하였다. 아들로는 2세 심성(沈晟)과 심연(沈淵)이 있다. 심연의 아들이 3세 심용(沈龍)이다. 심용의 아들이 4세 심덕부와 심원부다.
심덕부는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참여하여 좌의정을 하였고, 심원부는 벼슬을 마다하고 두문동에 들어가 자손들에게 조선의 벼슬을 멀리하라고 유훈하였다. 심덕부는 아들 5형제를 두었다. 5세 심온은 영의정을 하였으며 세종대왕의 왕비 소헌왕후의 아버지다. 심온의 아들 6세 심회 또한 영의정을 하여 심덕부, 심온, 심회로 이어지는 3대 정승을 냈다. 이후 심회의 후손 중에서 현달한 자손이 많이 나왔다.
청송심씨는 조선조 500년 동안 정승13명, 왕비3명, 부마 4명 등을 배출하는 등 이 나라 정계를 주름잡았다.
청송은 경북 동부에 위치하며 전북 익산과는 먼 거리인데 어떻게 2세조 묘가 있었는지 의아스럽다. 전설에 의하면 심연의 묘는 본래 경북 청송에 있었다고 한다. 아들 심용은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 묘가 명당이 아님을 한탄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자칭 명풍이라고 뽐내는 지관 하나가 들어왔다. 그는 묘자리를 잡을 생각은 안하고 날마다 술이나 마시고 주정을 일삼았다. 식구들 모두 싫어했지만 심용만은 전혀 기색 없이 10년 동안을 극진히 대접해주었다.
10년이 지난 후에야 지관에게 "이제 자리하나 잡아줄 때가 되지 않았냐"고 하자 지관은 거침없이 "그러면 재산 반절을 정리하여 돈으로 바꾼 다음 나를 따라 오라"고 하였다. 지관을 따라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어딘지도 모르게 따라왔는데 지관은 어느 종가 사당을 가리키면서 저곳이 명당이라고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앞이 캄캄한 심용은 막무가내로 그 집안으로 들어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집을 팔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종가 댁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일어지하에 거절하였다. 심용은 죽기를 각오하고 대문 앞에서 멍석을 깔고 단식을 하였다. 그 정성에 감복한 종가 댁에서는 드디어 집을 팔겠다고 하였다. 미리 준비한 많은 돈으로 보상을 충분히 해주고 그곳에 아버지 심연을 이장하였다.
그 후로 아들 심덕부와 손자 심온, 증손 심회가 3대를 걸쳐 정승을 하였으며 증손녀 소헌왕후가 났다고 한다.




전경


묘뒤에서 본 안산





청룡측




전경


백호측



묘우측옆


묘좌측옆


과협처


주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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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청송심씨 2세조 심연(沈淵) 묘- 69차 2003년9월28일전북 군산,옥구답사


사진가: 윤해근 * http://www.poongsoojiri.org

등록일: 2004-09-18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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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충석
남당산소사적(南堂山所事蹟)

남당산소는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읍 남당리로 원래는 함열현 동사면 조왕등이다.

함문지후공께서는 말년에 경상도산음 현감으로 출보되었다가, 임기가 끝난 뒤에도그 고을 석답촌 자연동(紫煙洞)에서 눌러 사시다가 별세 하신고로 내외분의 묘소가 산음에 계신 까닭에 청화부원군께서는 명당을 물색하여 면례해 드리고자, 1343년 전후를 기하여 충청도 한산땅에 큰 아드님 청성백을 가정이곡선생(稼亭李穀先生)에게 유학시키고 있었던 관계로 수차 왕래할 적에 이선생으로부터 본 명당을 소개받고 현장을 답사한 바, 천하대지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 자리에 강릉김씨의 사당이 있는지라 칠등(漆燈)을 묻어 치표(置標)하고 아드님에게 네가 장차 출세하여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면 산음 산소를 이곳으로 면리해 드리라고 유언 하셨다.


그후 청성백께서는 고려 조정에서 입신양명하여 50세가 되던 1377년(우왕3년)에 동직밀직사사겸 상호군을 거쳐, 서해도도원수겸, 도순문사에 제수되어서는 신주, 문화, 안악, 봉주 등지에 출몰하고 있는 왜구를 소탕작전 중 진포 지금의 금강 하류와 함열지역까지 추격하여 완전 소탕하고 개선한 바 있었는데, 그때 전투중 남당산을 지나다가 옛날에 아버지와 같이 와서 함문지후공 내외분의 묘소로 치표해 두었던 기억이 떠올라 수백 군졸을 인솔하고 사당집 주인 강릉김씨를 찾아가서 사당자리는 장차 우리 가문에서 장사 지내고자 칠등으로 치표된 곳인바 이제 설묘쿄자 하는 바이니 사당을 철거해 달라고 요청하자,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주인이 말하기를 선대부터 가문이 위급한 사태에 직면하면 사당안의 궤를 열어보라는 유언이 전해오고 있으니 보고난 뒤에 대답하겠다고 하고 나서 사당에 있는 궤를 열어본 바, 이 땅은 태등( 燈)이 불멸하니 장차 심문이 장사하리라 요청이 되면 이유를 불문하고 허락하여 멸문의 화를 면하도록 하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하며, 이는 반드시 하늘이 정해놓은 심문의 명당이라 하면서 '곧바로 사당을 옮겨 놓을 터이니 언제든지 장사지내도록 하시오'하여 원만히 타협이 성립되어, 그해 9월 20일에 산음 산소를 남당산으로 면례해 드렸고, 1379년 봄에는 석물을 설치해드렸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 후로는 실전하였는데, 1705년(숙종3년)에 전라도 임피(臨陂)사느 죽계공(竹溪公) 규(圭)께서 청년시절 려산향시에 함열 사는 김린을 만나 같은 여관에서 투숙하여 환담하던중 김린이 심규더러 묻기를 "선세에 함문지후공 연(淵)이 있는가?" 규가 대답하기를 '계시다.' "묘소를 아는가?" '모르고 있다.' "나의 선대 묘소도 함열에 있는데 그 옆에 고총이 있고 묘갈에 직함과 성명이 쓰여 있는 고로 내가 알고 있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도중, 김린의 숙부가 들어와서 김린을 꾸짖으며 말을 못하게하니 김린이 당황하며 말을 더하지 못하게 되었다. 규께서 귀가하여 집안 어른 준원(俊元)에게 그 사실을 고하니 준원께서는 아들을 김린의 부친 김응삼에게 보내서 간곡하게 물었으나, 굳게 숨기고 말하지 않는고로 서울 종중으로 통고했다. 종중에서는 유사(有司)로 하여금 수차 응삼을 심방하고 교섭하였으나 더욱 완강하게 숨겼으니 이는 그 선대로부터 함문지후공의 묘지에 투장한지가 이미 수세를 지냈으며, 표석은 수중에 버리고 지석은 파내서 못가운데 던져 영구히 감추어 버리려 했었던 까닭이었다.

후손 중량(仲良)께서 담양군수 시절에 정성을 다하여 지석이 감추어져 있는 곳을 탐문하여 매수하고 함열 현감에게 고발한 후, 1715년(숙종41년)에 못물을 퍼내고 지석을 찾아내니, 장이 8치요 광이 4치가량 되는 돌에 세줄로 쓰여지기를 중간에 함문지후심연지묘라 쓰고 왼쪽에는 흘산남당산진좌술향(屹山南堂山辰坐戌向)이라 쓰여 있고, 오른쪽에는 흥무 10년(1377년) 9월 12일장(葬)이라 쓰여 있으되 자획이 확연하니 김응삼도 김히 더 이상 은폐할 도리가 없어서 모든 것을 자복하고 그가 투장한 것을 모두 이장해 갔다. 판서공(檀), 감사공(仲良), 장영공(尙尹), 정언공(尙鼎) 등 경향의 제종이 모여서 상하봉을 개봉하였는데 묘갈(墓碣)이 훼박되었으며 고비위의 위차도 고증할 길이 없으나, 또한 억지로 변단할 것이 못되므로 양묘의 중간에 묘갈비명을 세우구 구 지석은 성석밑에 뭍었다. 실전된지 200여년만에 비로소 봉영을 찾아 모시게되니, 1720년(숙종46년) 지산 상공 수현(壽賢)께서 호서를 안극할 때에 만사상공지원(晩沙相公之源)의 외손으로 호남도백 이집과 심문의 외손인 함열현감 최상(崔祥)이 협력해서 상석을 갖추고, 그해 8월 13일에 비갈을 13세손 황해도관찰사 중량이 찬(撰)하고 글씨는 15세손 준(俊)께서 써서 세워드려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수호 봉향 절차는 보광산소의 예에 의하여 호장에게 일임해서 거행케 하였으며, 입토도 40여두락을 마련해서 음력 정월과 9월 15일에 향사케 하였고, 1806년(순조6년)에는 두실상공 상규께서 전라도 감영에 재임시 제각 3칸을 창간하였고, 1844년(헌종10년) 선익(宣益)께서 임피현령 재임시 행랑 7칸을 지으셨는데 갑오경장 후로는 호장제도가 폐지되면서 수호와 향사가 산유사에게 일임되어 왔으며, 임야와 입토는 종중 소유로 신고 되었다. 1976년 임야 일부가 농지로 개발된 것을 처분하여 대규모의 제각을 기공하여 9월 12일에 낙성식을 거행한 바 있으며, 현재의 춘추향사는 3월과 9월 11일에 봉행하고 있다.

남당산소사적(南堂山所事蹟)

남당산소는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읍 남당리로 원래는 함열현 동사면 조왕등이다.

함문지후공께서는 말년에 경상도산음 현감으로 출보되었다가, 임기가 끝난 뒤에도그 고을 석답촌 자연동(紫煙洞)에서 눌러 사시다가 별세 하신고로 내외분의 묘소가 산음에 계신 까닭에 청화부원군께서는 명당을 물색하여 면례해 드리고자, 1343년 전후를 기하여 충청도 한산땅에 큰 아드님 청성백을 가정이곡선생(稼亭李穀先生)에게 유학시키고 있었던 관계로 수차 왕래할 적에 이선생으로부터 본 명당을 소개받고 현장을 답사한 바, 천하대지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 자리에 강릉김씨의 사당이 있는지라 칠등(漆燈)을 묻어 치표(置標)하고 아드님에게 네가 장차 출세하여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면 산음 산소를 이곳으로 면리해 드리라고 유언 하셨다.


그후 청성백께서는 고려 조정에서 입신양명하여 50세가 되던 1377년(우왕3년)에 동직밀직사사겸 상호군을 거쳐, 서해도도원수겸, 도순문사에 제수되어서는 신주, 문화, 안악, 봉주 등지에 출몰하고 있는 왜구를 소탕작전 중 진포 지금의 금강 하류와 함열지역까지 추격하여 완전 소탕하고 개선한 바 있었는데, 그때 전투중 남당산을 지나다가 옛날에 아버지와 같이 와서 함문지후공 내외분의 묘소로 치표해 두었던 기억이 떠올라 수백 군졸을 인솔하고 사당집 주인 강릉김씨를 찾아가서 사당자리는 장차 우리 가문에서 장사 지내고자 칠등으로 치표된 곳인바 이제 설묘쿄자 하는 바이니 사당을 철거해 달라고 요청하자,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주인이 말하기를 선대부터 가문이 위급한 사태에 직면하면 사당안의 궤를 열어보라는 유언이 전해오고 있으니 보고난 뒤에 대답하겠다고 하고 나서 사당에 있는 궤를 열어본 바, 이 땅은 태등( 燈)이 불멸하니 장차 심문이 장사하리라 요청이 되면 이유를 불문하고 허락하여 멸문의 화를 면하도록 하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하며, 이는 반드시 하늘이 정해놓은 심문의 명당이라 하면서 '곧바로 사당을 옮겨 놓을 터이니 언제든지 장사지내도록 하시오'하여 원만히 타협이 성립되어, 그해 9월 20일에 산음 산소를 남당산으로 면례해 드렸고, 1379년 봄에는 석물을 설치해드렸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 후로는 실전하였는데, 1705년(숙종3년)에 전라도 임피(臨陂)사느 죽계공(竹溪公) 규(圭)께서 청년시절 려산향시에 함열 사는 김린을 만나 같은 여관에서 투숙하여 환담하던중 김린이 심규더러 묻기를 "선세에 함문지후공 연(淵)이 있는가?" 규가 대답하기를 '계시다.' "묘소를 아는가?" '모르고 있다.' "나의 선대 묘소도 함열에 있는데 그 옆에 고총이 있고 묘갈에 직함과 성명이 쓰여 있는 고로 내가 알고 있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도중, 김린의 숙부가 들어와서 김린을 꾸짖으며 말을 못하게하니 김린이 당황하며 말을 더하지 못하게 되었다. 규께서 귀가하여 집안 어른 준원(俊元)에게 그 사실을 고하니 준원께서는 아들을 김린의 부친 김응삼에게 보내서 간곡하게 물었으나, 굳게 숨기고 말하지 않는고로 서울 종중으로 통고했다. 종중에서는 유사(有司)로 하여금 수차 응삼을 심방하고 교섭하였으나 더욱 완강하게 숨겼으니 이는 그 선대로부터 함문지후공의 묘지에 투장한지가 이미 수세를 지냈으며, 표석은 수중에 버리고 지석은 파내서 못가운데 던져 영구히 감추어 버리려 했었던 까닭이었다.

후손 중량(仲良)께서 담양군수 시절에 정성을 다하여 지석이 감추어져 있는 곳을 탐문하여 매수하고 함열 현감에게 고발한 후, 1715년(숙종41년)에 못물을 퍼내고 지석을 찾아내니, 장이 8치요 광이 4치가량 되는 돌에 세줄로 쓰여지기를 중간에 함문지후심연지묘라 쓰고 왼쪽에는 흘산남당산진좌술향(屹山南堂山辰坐戌向)이라 쓰여 있고, 오른쪽에는 흥무 10년(1377년) 9월 12일장(葬)이라 쓰여 있으되 자획이 확연하니 김응삼도 김히 더 이상 은폐할 도리가 없어서 모든 것을 자복하고 그가 투장한 것을 모두 이장해 갔다. 판서공(檀), 감사공(仲良), 장영공(尙尹), 정언공(尙鼎) 등 경향의 제종이 모여서 상하봉을 개봉하였는데 묘갈(墓碣)이 훼박되었으며 고비위의 위차도 고증할 길이 없으나, 또한 억지로 변단할 것이 못되므로 양묘의 중간에 묘갈비명을 세우구 구 지석은 성석밑에 뭍었다. 실전된지 200여년만에 비로소 봉영을 찾아 모시게되니, 1720년(숙종46년) 지산 상공 수현(壽賢)께서 호서를 안극할 때에 만사상공지원(晩沙相公之源)의 외손으로 호남도백 이집과 심문의 외손인 함열현감 최상(崔祥)이 협력해서 상석을 갖추고, 그해 8월 13일에 비갈을 13세손 황해도관찰사 중량이 찬(撰)하고 글씨는 15세손 준(俊)께서 써서 세워드려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수호 봉향 절차는 보광산소의 예에 의하여 호장에게 일임해서 거행케 하였으며, 입토도 40여두락을 마련해서 음력 정월과 9월 15일에 향사케 하였고, 1806년(순조6년)에는 두실상공 상규께서 전라도 감영에 재임시 제각 3칸을 창간하였고, 1844년(헌종10년) 선익(宣益)께서 임피현령 재임시 행랑 7칸을 지으셨는데 갑오경장 후로는 호장제도가 폐지되면서 수호와 향사가 산유사에게 일임되어 왔으며, 임야와 입토는 종중 소유로 신고 되었다. 1976년 임야 일부가 농지로 개발된 것을 처분하여 대규모의 제각을 기공하여 9월 12일에 낙성식을 거행한 바 있으며, 현재의 춘추향사는 3월과 9월 11일에 봉행하고 있다.
2005-04-10
17:14:58
2005-05-29
00: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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