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이야기

연이 떨어지는 자리, 연주리

담휴재 2015. 11. 30. 03:25

연이 떨어지는 자리, 연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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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릉의 천장에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세종의 사후 조선 왕조에 일대 피바람이 몰아친다. 문종이 즉위한 지 겨우 2년 만에 죽고, 아들인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 영월 땅에 유배되어 죽는다. 왕자 여섯도 죽음을 당하는 등 왕가에서 골육상쟁이 끊이지 않았다. 곧바로 이런 환난은 세종의 묘를 잘못 썼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결국 예종 1년(1469) 세종의 묘를 파내보니 수의마저 썩지 않은 채로 물이 가득 차 있었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세종의 묘는 매우 좋지 못한 자리로서 왕가의 화를 자초했다는 것이 공인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예종은 개장할 묘소를 지금의 서울 땅에서 40킬로미터 이내에서 찾도록 했는데 이때 지관이 천거해 천장한 곳이 하늘의 신선이 하강하는 천선강탄(天仙降誕)형, 또는 신선이 앉아 있는 선인단좌(仙人單坐)형이라고 불리는 현재의 영릉이다.

그 자리는 원래 광주 이씨 삼세손인 충희공 이인손의 묘택이 있던 곳이다. 이인손은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해 우의정에 이르렀고, 그의 부친은 청백리로 유명한 이지직이고, 조부는 고려 말의 절의와 명문으로 명성을 떨쳤던 둔촌 이집이다. 현재 서울시 강동구 둔촌동은 둔촌 선생이 있었던 곳이라 해 붙은 이름이다.

둔촌은 충목왕 3년(1347) 문과에 급제한 뒤 정몽주, 이색 등 당대의 거유각주[1] 들과 교유했다. 이후 합포종사를 지내고 신돈을 논박하다 미움을 받자, 늙은 아버지를 업고 영천으로 피신해 천곡 최윤도의 집에서 3년 동안 기거했다. 이때 최윤도는 두 명을 다락에 숨겨두고 부인과 여종 연아 등 가족들의 보호를 받도록 했다.

일화에 따르면 연아는 다락에 두 명의 외부인이 있는 줄 모르고 주인이 갑자기 식욕이 좋아지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평소에는 일 인분의 식사도 남길 정도였는데 어느 날부터 몇 인분의 식사를 거뜬히 해치웠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이 다락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안 연아는 주인의 뜻을 알고 자결해 비밀을 유지했다.

이인손은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이 일러주는 내용을 유언으로 쓰는 조건으로 묘택의 세부 사항을 알려주었다. 첫째는 묘택 앞을 흐르는 개울에 절대로 다리를 놓지 말 것이며, 둘째는 재실이나 사당 등 일체의 건물을 짓지 말라는 것이었다. 광주 이씨 문중은 이인손의 유언을 그대로 지켰다. 그러자 이인손의 친자 5형제와 종형제 3인을 합해 '팔극조정(八極朝廷)'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정승, 판서가 가문에서 쏟아져나왔다. 그러나 후손이 볼 때 이인손의 묘택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양반 체면에 다리도 없는 냇물을 신발 벗고 건너야 하는 것은 물론, 멀리서 온 자손이 잠잘 곳도 없이 모이자마자 헤어져야 하는 등 제사를 지낼 때마다 고역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남부러울 것 없는 집안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자 문중 회의에서 유언에 반해 재실을 짓기로 결정했다.

한편 예종의 명으로 여주와 이천 쪽으로 세종의 천장 자리를 보러 나온 지관 안효례는 명당자리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났다. 비를 피할 곳을 찾는데 산자락 아래 조그마한 건물이 보였다. 광주 이씨 문중에서 전해에 세운 재실이었다. 그는 그곳을 향해 달렸는데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 나타났다. 갑자기 쏟아진 소낙비 때문에 냇물이 불어 섣불리 건널 수 없었던 것이다. 낙담해 두리번거리던 그는 아래쪽에서 돌다리를 발견하고 냇물을 건너 재실에서 소낙비를 피했다.

소낙비가 그치자 주위를 돌아본 안효례는 깜짝 놀랐다. 그곳이 바로 자신이 찾아다니던 천하의 명당이었기 때문이다. 소낙비를 피하게 만들어준 고마운 묘택의 묘비를 보니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것이었다. 고민하던 그는 산도(山圖)를 그려 예종에게 이인손의 묘택이 이미 자리 잡고 있음을 고하면서 세종의 묘로 추천했다. 그 자리는 군왕의 묘택으로서는 적합하지만 정승의 묘택으로는 과분하다는 설명도 첨언했다.

연주리 풍경

예종은 영릉을 위해 이인손의 묘 터를 내놓은 광주 이씨 가문에 많은 재물을 하사하고 조선의 어느 곳에라도 묘를 쓰라고 했다.

물론 여기에도 전해지는 일화가 있다. 당시 광주 이씨 가문은 조정의 요직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가 이인손의 묘택 때문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이것을 우려한 한 왕손이 조선은 전주 이씨 왕조가 아니라 광주 이씨 왕조라고 한탄하며 전주 이씨 왕조의 앞날이 어둡다고 개탄했다.

세종의 천장 자리로 이인손의 묘택을 선정한 진짜 이유는 광주 이씨의 기를 잘라내기 위해서였다는 설명이다. 당시에 여러 지관이 천장 장소로 여러 대상지를 추천했는데도 굳이 우의정을 지낸 공신의 묘를 선정한 이유가 여기 있다.

예종은 당시 평안도 관찰사로 있던 이인손의 큰아들 광릉부원군 이극배를 조정으로 불렀다. 아무리 왕이지만 사대부의 묘택을 함부로 어찌할 수는 없었다. 예종은 명당 터를 양도해 달라고 우회적으로 압력을 넣었고 결국 이극배는 할 수 없이 문중 회의를 열고 선친의 묘 터를 내놓았다.

그러자 예종은 광주 이씨 가문에 많은 재물을 하사하고 이극배를 의정부 우참찬(정2품)으로 승진시킨 후 조선의 어느 곳에라도 이인손의 묘를 쓰라고 했다. 이인손의 묘를 파서 유해를 들어내니 그 밑에 있는 비단에 다음과 같이 적힌 글이 있었다.

"단지대왕영폄지지(短之大王永窆之地)."

이는 단지대왕이 묻힐 자리라는 뜻으로 단지대왕(한쪽 다리가 짧다는 뜻)이란 세종대왕을 뜻한다. 이 사실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명확한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에 세종이 발을 절지 않았는데도 이를 호도각주[2] 했다면 광주 이씨 전체가 큰 화를 입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지관의 글은 계속되는데 이 자리의 주인이 나타나면 "이곳에서 연을 날려 하늘 높이 떠오르거든 연줄을 끊어라. 그리고 연이 떨어지는 곳에 나의 묘를 옮겨라"라고 적혀 있었다. 글대로 연을 날리자 연은 바람에 날려 서쪽으로 약 10리 밖에 떨어졌고 그곳에 이인손의 묘택을 삼았다. 이곳을 연이 떨어졌다 해 연당 혹은 연주리라고 부르며 현재의 능산면 신지리다.

세종대왕의 천장은 조상의 기운이 후손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동기감응 혹은 친자감응의 예로 잘 알려져 있다. 묘를 잘못 택했기 때문에 조선 초기에 수많은 환고가 있었지만 천장한 후에는 지덕 때문에 후손에게 큰 불행을 초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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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이종호 전체항목 집필자 소개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페르피냥 대학교에서 공학박사 학위(Dr. Ing.)와 '카오스 이론에 의한 유체이동 연구'로 과학국가박사(Dr. d'Etat.....펼쳐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