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이야기

풍수답사 - 신명사도의 현장

담휴재 2007. 6. 24. 00:13
. 풍수답사 - 신명사도의 현장


(1) 산해정(山海亭: 경남 김해시 대동면 주중리 원동소재)


 

① 남명이 30세(1530년)때 자신의 학문공부를 위해 건립했던 산해정은 김해 신어산 동편에 있으며, 오늘날 그곳에는 신산서원이 있습니다.

서원사당에는 남명이 배향되어 있고 그 중 강당은 남명 건립 당시 산해정 건물로서 배치와 구조 그리고 좌향까지 원형을 유지하고 있기에 이곳 풍수현장의 유일한 기준점이 됩니다.


② 산해정을 처음 답사 했을 때부터 알아차렸던 배산형국을 두고 여러사람에게 무엇같이 생겼냐고 물어 보았더니 풍수를 전혀 모르는 방송리포터 처녀는 뭔가 웅크리고 있는 산 같다고 했고, 풍수를 몰라도 눈설미만은 뛰어난 촬영기사는 힘센 소가 웅크리고 있는 모양이라고 대답했습니다.

③ 그러자 옆에 있던 풍수 직계제자(당시 대학교 4학년. 풍수공부 2년차) 고녀석이 엎드린 호랑이라고 그들에게 일러 주었습니다.

왜 소가 아니냐는 촬영기사의 의문에 저산에는 소뿔에 해당되는 바위가 없다며, 뿔 없는 소 보았느냐는 반격에 “아!, 맞다!”며 빙그레 웃더군요.

덩달아 리포터 처녀 “그러니까 저곳이 호랑이 등, 엉덩이, 입”을 지적하더니

④ “얼래, 호랑이가 신산서원을 잡아 먹을라고 폼잡네......”

하더군요.

이러한 반풍수 대화들을 듣더라도 호구혈(虎口穴)에 입지한 것이 산해정임을 여러분은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형세론을 적용시키면 사진에 보이는 강당은 혈이 되고, 그 뒷녘에 있는 사당은 잉에 해당되기에 사당이 강당보다 한단 더 높은 곳에 자리한 풍수 이유도 알게 됩니다.

⑤ 이곳을 처음 답사했을 때, 파악된 복호(伏虎)배산과 호구혈에 택지된 산해정을 발견하고서 남명에게서 풍수 한수를 배울 수 있다는 기쁨에 혈자리인 신산서원 강당(산해정) 뒷녘에서 앞을 바라보았습니다.

앞녘에 봉긋이 놓여있는 안산(案山)과 안대좌향을 보고 올커니 하고 무릎을 쳤습니다.

⑥ 그런데 그것도 잠시 뿐, 사진에서 보이는 옥녀봉 같은 목성(木星)이 풍수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저것이 산해정 우백호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돛대봉(380m)으로 몇 년 전 김해공항으로 회항하던 중국 여객기가 저 봉우리와 부딪쳐 전국민을 놀라게 했던 대참사현장도 되는데, 아무튼 우백호 기세가 저렇게 솟구치면 호환(虎患)을 당한다는 풍수문제가 일어납니다.

⑦ 눈을 돌려 산해정 좌측편 좌청룡을 보면 돛대봉과는 대조적으로 웅크리고 있는 까치봉이 있습니다.

금성(金星)에 해당되는 까치봉은 좌청룡으로도 실격이 됩니다.

청룡은 출렁거리며 생동하여야 하는데 저렇게 웅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청룡과 백호가 서로 바뀌어 입지하였더라면 금상첨화가 되는데.

⑧ 게다가 좌측은 목성(木星)이 되고 우측은 금성(金星)이 되기에 오행도 들어맞고…이런 아쉬움의 시선으로 산해정 건물을 바라보자 또 이것도 이상한 배열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산서원 현판을 중심으로 좌청룡 쪽에 큰방이 있고, 우백호 쪽으로 작은 방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전통건축에 배어있는 유교시각 배치는 이서위상(以西爲上)을 따르기에 서(西)쪽을 상징하는 우측편을 중요시하여 큰 방을 우측에 두게 되는데, 산해정은 좌측에 큰방이 있다는 것입니다.

(※ 설명을 이해하시는 분은 해당되지 않지만 산해정에 대한 좌우설명이 헷갈리는 사람은 당장 서구시각부터 버릴 것. 우리 전통풍수시각으로 좌우구별을 고정하여야 함. 천재적인 수학과 교수가 좌우 서구시각 혼돈을 일으키다가 강의 7주 후 음양혼란이 일어나 풍수강의를 포기한 적도 있음. 우리시각으로 모든 것을 항상 고정시키고 서구시각은 보조수단으로 사용해도 생활상 아무불편은 없음. 30년 직접 경험측)


돛대봉, 까치봉이라는 좌우 청룡, 백호와 목성(木星)과 금성(金星)까지 정반대로 놓여있는 이곳 텃자리를 유학자적인 의지로 산해정 배치를 바꾸어 놓은 것이 남명의 풍수비보임은 짐작되었습니다.

부연 설명하여 드리자면 남명은 유학자입니다. 유교의 가장 큰 본질은 인간 그 자체의 의지를 중시하는 것입니다. (인하여 정신집중 敬공부를 가장 중요시 했다.)

이러한 의지의 주체가 좌혈 하는 산해정 배치에 이서위상 상징들을 바꾸어 놓으면(우측에 있어야 한 큰방을 좌측으로 배치했다.), 상대적으로 좌측은 우측이 되어 우백호에 까치산이 해당되고, 웅크린 형상은 백호준거, 까치산 금성(金星)또한 서쪽을 상징하는 풍수길격이 됩니다.

이럴 때. 우백호 돛대산도 상대적으로 좌청룡이 되고, 솟아오르는 형상은 청룡완연을, 그리고 목성(木星)은 좌측이 되어 산해정 좌우 용호들은 풍수상 제대로 자리한다는 상징을 부여받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혈자리의 상징배열이 좌우 개념도 바꿀수 있다는 이론적 제시는 왕릉풍수 곡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제10강 내용이기에 10강 때 설명하겠음)

그런데 이곳은 그런 이론 맞추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신명사도에 걸린 풍수시각을 그것도 직접 현장에서 밝혀야 한다는 바로 그것입니다.

가령 산해정 풍수비보를 해석한 저의 해석이 백번 맞는다 해도, 이것을 남명이, 그것도 신명사도 그림으로서 입증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모든 것은 학설을 위한 학설의 짜깁기 미사어구 병통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런 것이 현장풍수의 냉혹한 현실이며, 특성이기도 합니다.

산해정 주변 풍수분석이 어느 정도에 이르자, 또다시 외부의 제2관점을 잡았는데, 산해정 전방 3~4km 정도 떨어진 하필이면 남해고속도로... 그것도 번잡한 대저분기점을 조금 벗어난, 너도나도 100km 씽씽 달리는 바로 그 지점이었습니다. 멀쩡한 차를 고장 났다고 앞 뚜껑 열어 놓고 갓길에 세우고, 비상 깜박이 키고 서있는 틈을 타서 관산, 촬영, 분석을 치루자는 제자들의 별의별 의견은 아무래도 위험천만을 초래할 수 있기에 복잡한 길을 다시 돌아서 논두렁에 차를 세워놓고 고속도로 축대를 올라 도로바깥쪽 철망에 붙어서 찍은 사진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훨씬 쉬웠다. 이곳 관산점 접근로를 파악했기 때문에)

 

 

 

 

 

 

 

 

 

 

 

 

 

 

 

 

 

 

 

 

 

이곳 관산점에서 관산한 산해정 일대의 국면은 너무나 또릿한 국면을 형성하고 있기에 당시 남명 또한 이곳을 놓칠 수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해정 택지 때 좌우용호의 문제를 풍수비보 할만한 값어치는 충분히 있는 풍수광경이었습니다.

산해정 산세국면을 상세히 관산 하다가 차츰 신명사도 그림과 눈맞춤을 하게 되었습니다.(자꾸 신명사도 그림이 어련거려 왔다.)

그때부터 현장광경과 자료들은 모두 연구실 책상위로 옮겨져서 분석작업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조감방식 작업은 풍수분석서 작성시 수년간 해왔던 일련의 작업들이었기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하루밤 사이에 모든 것들은 분석되어 나왔습니다.

새벽녘에는 산해정 광경과 나란히 어깨동무하고 있는 신명사도 모습까지 보였습니다.

 

 

 

 

 

 

 

 

 

 

 

 

 

 

 

 

 

 

 

 

 

 

 

 

 

 

 

 

 

 

 

 

 

 

 

 

 

 

 

 

 

 

 

 

 

 

 

 

 

 

 

 

 

 

 


 

 

 

 

 

 

 

 

 

 

 

 

 

 

 

 

 

 

 

 

 

 

 

 

 

 

 

 

 

 

 

 

 

신명사도 분석 마지막 부분은 기대이상의 성과였습니다.

풍수원리 형세론 사법(砂法)에 속한 사신사(四神砂)법칙 그대로 적용하자면 산해정 좌측에 있는 까치봉은 좌청룡에 해당되고 양(陽)이며, 이는 태양(日)에 해당됩니다. 우측편 돛대봉은 우백호에 해당되고 陰이며, 달(月)이 되어야 당연합니다.

그런데 남명이 신명사도에 표기한 좌측에는 日이 아닌 月이 쓰여져 있고 月자가 들어가야 하는 우측편에 日자가 뚜렷히 적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日,月의 위치가 뒤바뀌어진 점)이 남명풍수의 비보처리를 증명하는 것이며, 산해정 큰방이 이서위상을 상징하는 우측이 아닌 반대편 좌측에 있는 까닭이며, 남명학 연구학설에서 밝히고 있는 신명사도 제작 1566년 이전설 보다 20여년 앞선 1545년이전설(산해정 시절)을 주장 할 수 있다는 논증이 되기도 합니다.

신명사도는 이곳 산해정 주변을 기본형으로 삼을 때만 제작 가능한 풍수도면이기 때문입니다.

남명의 신명사도 일월 표기설에 대하여 후일 비판내용이 터져 나오는데 이것 역시 저의 현장답사 조명을 오히려 입증시켜주는 자료도 되기에 당시 현장자료집(2001년 봄학기)에 실었던 부분을 그대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상과 같이 풍수시야로 재조명하여본 신명사도는 산해정 주위녘을 풍수해석과 함께 당시 심경(心經)을 좌우명으로 삼고서 성리학(性理學)을 깊게 공부했던 남명의 성리도면인 동시에 건축도면임이 새롭게 드러난다.

남명이 이곳 산해정시절에 신명사도를 그렸다는 문헌적 단서는 후일 남명의 10세손인 복암(復庵)의 복암집 권집4 변신명사도(辯神明舍圖)에서 비판한 내용이 오히려 귀중한 논증자료가 되고있다.


「…일재동월재서(日在東月在西) 목속양이속음(目屬陽耳屬陰) 시기위지정야(是基位支正也) 원중일월여(圓中日月與) 이목양관(耳目兩關) 계역기위이반지(階易基位而反之)…

…해(日)는 동(東)쪽에 , 달(月)은 서(西)쪽에 있다. 눈(目)은 양(陽)에 속하고, 귀(耳)는 음(陰)에 속한다는 것이 바른 위치가 된다. (신명사도) 원중의 日月과 耳目의 위치는 반대로 되어 있다.…」


복암이 비판하고 있는 좌우와 음양 더불어 일월의 위치배열은 풍수법칙에도 딱 들어맞는다. 필자역시 남명의 신명사도를 방안풍수와 같이 책상에서만 보았을 때는 복암의 주장처럼 신명사도에 그려져 있는 日月과 耳目의 배치는 틀렸다고 한동안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곳 산해정을 현장답사한 후 산천은 보고서 신명사도의 일월과 이목의 위치가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산해정의 입지조건에서 그랬다.

산채정 우측에 있는 돛대봉은 옥녀봉(玉女峯)처럼 木星이 되어 동쪽기운으로 상징되고, 까치봉은 솥을 엎어 놓은 金星으로 서쪽 기운으로 상징되는 풍수법칙에 따라 남명은 신명사도에 돛대봉자리에 日과 目을, 까치봉자리에 月과 耳를 그려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입지조건에 놓여있지 않은 뇌룡정과 산해정은 이서위상(以西爲上)인 좌우명(座右銘)의 배치가 다르게 된다. 산해정은 좌측에 풍수법칙인 금성(金星:까치봉)이 있기에 좌측에 좌우명이 상징되고, 뇌룡정은 일반원리에 따라 우측이 좌우명 자리가 된다.

이점 산해정과 뇌룡정 강당의 매김에서 드러나고 있다.

강당 좌우협실 중 2칸짜리 협실이 산해정은 좌측에 있고, 뇌룡정은 우측에 있다.

결국 음양해석에 따라 건물구조 매김이 정반대의 영향까지 준 것이다.

신명사도는 이곳 산해정 주위녘의 산세를 스켓치한 것으로 남명이 산해정 시절에 그린 것일 때 신명사도는 새로운 2가지 의미를 갖게 된다.

첫째 ; 조선조 성리학자가 그린 최초의 건축설계도로서(퇴계의 옥사도자 보다 20여년은 앞선다.) 그것은 성리풍수도면(性理風水圖面)이라는 것이다.

둘째 ; 산해정(1530년)산세의 신명사도가 뇌룡정(雷龍亭:1548년)과 산천재(山天齋:2561년)로 연결되는 흐름을 갖고 있는 점으로 이는 남명사상의 흐름마저 엿볼 수 있다.

이와같은 흐름은 남명사상을 새로운 각도에서 접근해 볼 수 있는 제시이기도 하다.

신명사도로서 뇌룡정을 조명하여 보고 산천재를 다시 조명하는 작업은 바로 남명사상을 조명하여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풍수조명이며 본 답사의 체험이기도 하다. ”

출처 장영훈의 풍수서원